PFLP 동시다발 하이재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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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wson's Field hijackings
חטיפת המטוסים לשדה דוסון
حادثة اختطاف الطائرات إلى قيعان خنا
1. 개요[편집]
1970년 9월 6일에 일어난 동시다발 하이재킹 사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산하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이 일으킨 사건이다.
2. 사고기들의 정보[편집]
- 사고 8년 전에 찍힌 엘알 219편, (LY219, 4X-ATB) - 보잉 707-458. 텔아비브발 암스테르담 기착 뉴욕행으로 사복경찰을 포함한 승객 138명, 승무원 10명 탑승.
3. 사건[편집]
3.1. 배경[편집]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으면 팔레스타인/역사, 검은 9월 문서 참조.
1947년 팔레스타인 분할안과 1948년 제1차 중동전쟁 이후 팔레스타인 난민이 요르단으로 급속히 들어와 결국은 요르단인보다 팔레스타인인이 더 많아지는 상황에 이르자 당시 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적절히 자치권을 주면서 자극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한편 1967년 결성된 PLO는 팔레스타인을 대표한답시고 자치권을 남용해 각종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는데 후세인 1세는 제지했지만 이들은 쌩까고 계속 범죄를 저지르고 다녔다. 요르단과 관계가 험악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서 요르단군과 수차례 내전까지 하였으며 1970년은 그 양상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게다가 일부 지역에서 무단 통치까지 실시하면서 후세인 1세와 PLO 간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그 와중에 PLO의 강경분파 중 하나였던 PFLP(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2] 에서 사건을 저질러 버렸다.
3.2. 납치[편집]
1970년 9월 6일 각지에서 뉴욕으로 가던 엘알 219편, TWA 741편, 스위스에어 100편, 팬암 93편이 PFLP 조직원에 의해 납치되었다.
그러나 LY219편에서는 이스라엘이 당시 불안한 정세 때문에 사복경찰을 배치한 게 묘수가 되었다. 조직원 2명은 그것도 모르고 납치했다가 사복경찰에게 걸려 1명이 사살당하고 1명은 총격전 끝에 시민의 협조로 검거되었다. LY219편은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에 비상 착륙했다.
TWA741편, SR100편은 납치되어 '혁명 공항'에 강제착륙당했다. 이곳은 요르단의 도시인 자르카 근교 사막의 PLO 무단통치지로 원래 영국 공군의 도슨 공군기지가 있었지만 영국군이 철수하고 PLO가 접수해 기지로 활용하고 있었다.
PA93편은 크고 아름다운 이 비행기가 '혁명 공항'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조직원들의 판단에 따라 카이로 국제공항에 착륙해 폭파시킨 후 조직원들은 인질을 풀어주고 경찰에 순순히 투항하였는데 이것이 보잉 747의 첫 기체손실이다.
9월 9일에는 영국해외항공(BOAC) 775편이 납치되었다.
3.3. 협상[편집]
곧 '혁명 공항' 주변으로 각국의 외신들이 모여들었다. PFLP는 이들을 모아 놓고 서방 국가에 잡힌 PFLP 조직원들과 이 납치 작전의 범인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면서 안 들어 주면 인질을 항공기에 태운 채 항공기를 폭파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리고 9월 7일 PFLP 조직원들이 구속되었던 이스라엘, 서독, 스위스, 영국, 미국 국적을 가졌거나 유대인, 승무원을 제외한 인질 125명을 석방하였다.
스위스, 영국, 서독은 9월 8일 협상을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PFLP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정부 방침 상 협상을 거부했고 대리로 국제적십자사 위원들이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미국은 지중해에 전개한 제6함대와 터키에 전개한 공군부대를 출동 대기 상태라며 공갈을 실시했지만 실제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이로 인해 단단히 빡친 후세인 1세는 군대를 배치하고 협상을 시작했다.
9월 11일 인질 중 여성과 어린이를 중심으로 한 일부가 풀려나 56명이 남았다.
9월 12일 각국과의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어 인질 전원이 석방되었다.
3.4. 폭파[편집]
그러나 PFLP는 "이스라엘과 국제사회에 대한 항의" 라면서 항공기 3대를 차례로 폭파시켜 버렸다. 이 장면은 각국에 그대로 방영되었으며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상징하는 사진으로 남았다.
3.5. 사건 이후[편집]
이 사건으로 극도로 분노한 후세인 1세는 9월 15일 이를 보복하기 위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PLO를 공격해 레바논으로 내쫓아 버렸다. PLO는 "요르단의 배신"이라며 부득부득 이를 갈았으며 1972년 여기에서 갈라져 나온 검은 9월단이 사고를 거하게 쳐 버렸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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